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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나의 부친 채택룡 - '카프'문학소년의 성장​ (채영춘)

潮歌家族 潮歌网 202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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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림신문  대형구술시리즈  '문화를 말하다' 36 

 채영춘 편 1 

나의 부친 채택룡 - '카프'문학소년의 성장

https://v.qq.com/txp/iframe/player.html?width=500&height=375&auto=0&vid=a3056tgsi3s

본기는 원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선전부 부부장으로 사업했던 문화인 채영춘선생의 구술을 통해 시청자들과 독자들에게 그의 부친이며 중국조선족 제1대 아동작가,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정초자인 채택룡선생과 그의 장인이며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무용가,중국조선족무용의 정초자, 교육자였던 조득현선생의 업적 그리고 연변의 언론, 출판, 문학, 선전분야에서 문화리더로 맹활약을 펼친 채영춘선생의 문화실적을 총10기로 나누어 조명하려 합니다. 

채영춘 프로필

1951년 3월 12일 연길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통신대학 1979-1984)

연변대학 중문학부 졸업(1982-1984)

경력

화룡현 룡문공사 연풍7대 지식청년(1968-1971)

화룡현아동저수지 공청단 단위서기(1971-1975)

연변인민교육출판사 편집(1976-1984)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판공실 처장(1984-1990)

연변 《지부생활》잡지사 총편집(1990-1992)

연변TV방송국 국장(1992-1998)

연변조선족자치주신문출판국 국장(1998-2004)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선전부 상무부부장(2004-2010)

연변대학교 겸직 교수(1996-2010)

연변미술가협회 명예주석

연변조선족자치주정치협상회의 제9. 10기 위원

중국작가협회 제7회 전국대표대회 대표

현재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일보 》론설위원

길림성조선문신문잡지도서심열위원회 전문가위원

수상

수필 〈아버지의 호령〉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대상 수상

산문 〈포지션잡담〉 청년생활 화신문화상

미술평론 성과로 제7회 연변조선족자치주진달래문예상 영예상

에세이집 《래일은 오늘에서 모양 짓는다 》 제8회 연변조선족자치주진달래문예상 창작상을 수상

연변조선족자치주민족문화전승발전특출기여인물로 선정(2017년)

저서

에세이집 《래일도 연은 하늘에서 날것이다 》(2001년)

에세이집 《샘이 깊은 물 》(2007년)

에세이집 《래일은 오늘에서 모양 짓는다》(2015)

에세이집 《고향관 》 (2020년)

随笔集 《岁月情 》(2009年)

散文集 《明天须由今日塑形 》(2019年中国少数民族文学发展工程翻译出版扶持专项)중국소수민족문학발전프로젝트번역출판부축대상

수필 〈아버님의 유산〉 〈송년론〉 조선어문교과서에 수록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정초자 채택룡 선생의 창작생애를 소개하고 있는 채택룡의 아들 채영춘.

부친 채택룡

저의 부친 채택룡(蔡泽龙 본명 채규명)선생은 1913년 2월 6일 조선 함경북도 회령군 솔골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어요. 할아버지는 채진묵이고 할머니는 김은석이구요.

부친은 1928년 16살에 ‘카프’ 잡지 《별나라 》에 동시 〈어린동생〉을 발표하면서 창작생애를 시작하였어요. 1938년 12월 아버지는 부모들과 함께 동북으로 이주하여 연길현 명륜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어요.

해방전 동요동시를 위주로 아동문학작품 100여편(수)발표하고 《3인동요집 》을 출판하였지요. 이 시기에 발표한 동요 〈개미〉, 동시 〈사랑하는 누나〉, 동화 〈딱따구리〉, 소년소설 〈삶의 빛〉 등은 중국조선족아동문학 쟝르개척의 토대를 마련하였어요.

아버지께서는 1945년 10월 혁명사업에 참가하여 1950년까지  《한민일보 》,  《길림일보 》,  《인민일보 》,  《연변민보 》,  《동북조선인민보 》, 《연변일보 》에서 편집, 기자로 사업하면서 문학창작에 정진하였어요.

채택룡선생의 필체로 된 략력.

1951년에는 《연변문예 》잡지 초창기 편집으로 사업하였고 1952년에는 룡정연변고중에서 조선어문 교원으로 교편을 잡았어요.

1956년에 증국작가협회에 가입하였고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창작위원회 부주임, 《아리랑 》잡지 편집비서를 력임하였어요. 그동안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 2, 3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구요.

1945년부터 1956년사이 종합집  《어깨동무 》, 동요동시집  《나팔꽃 》을 출판하였어요. 이 시기에 창작한 가사 〈베짜기노래〉(허세록 작곡)는 1954년 전국군중가요평의에서 2등상을 수상하였어요.

1959년 억울하게 우파모자를 쓰고 창작자유를 박탈당하였으며 1964년부터 장장 19년간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였지요. 1983년에 귀국하여 온갖 정치명예를 회복하였고 이듬해 1984년 동요동시집 《병아리 》를 출판하였어요.

그러다가 1998년 10월 그 어떤 원망도 욕망도 없이 이 세상을 하직하였어요. 이것이 저의 부친 채택룡의 대체적인 인생궤적이예요.

‘카프’문학소년의 성장

부친의 문학창작생애를 되돌아보면 아버지께서 자란 환경은 반일경향이 아주 강한 가문이였어요. 아버지한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할아버지 그러니 저한테는 증조할아버지 되는 채상홍이라는 분이였지요. 그리고 또 아버지의6촌 형 되는 분한테서 반일사상을 많이 전수받은 것 같았어요.

아버님은 어렸을 때부터 책보기를 특별히 좋아했다고 했어요. 그때는 빈한한 농민가정에서 책 한권을 산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지요. 그런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손자한테 책을 사는데 보태 쓰라고 가담가담 용돈도 줬다고 했어요.

하루는 할아버지께서 손자를 부르시더니 록두라든가 팥이랑 미투리를 삶아가지고 읍 장마당에 가서 팔아 어렵게 모은 돈 7원을 전부 내놓더래요. 그 당시 잡지 한책이 5전이였다니 7원이면 그 돈이 얼만나 큰 돈이였겠어요.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평생 그 일을 잊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아버지의 회억록에도 가담가담 많이 올리군 했지요.

그 돈을 가지고 아버지가 뭘했냐 하면  《별나라 》, 《신소년 》 잡지를 비롯한 그 시기 진보적 서적들을 샀대요. 《별나라 》라 하면 ‘카프'시기의 아동문학잡지예요.

‘카프'시기 30년대 채택룡 작가.

‘카프'는 조선 프로레타리아문학예술동맹의 간칭이지요. 최서해라든가 강경애 같은 이들이 바로 카프작가들이지요. 이런 작가들은 후에 조선반도로 되돌아 나가고 하여 중국조선족작가반렬에‘카프'시기 작가는 저의 부친 밖에 없었어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카프' 를 지향하며 ‘카프'의 기치를 따른 저의 아버지에게 가문의 영향은 결정적인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께서는 늘 리순신, 을지문덕 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영웅담을 들려주었고 6촌 형님 되는 분은 조선 ‘3.1’운동에 참가하여 일제서대문형무소에까지 갇혔던 반일지사로서 늘 아버지에게 일제의 폭정, 잔인무도함을 성토하여 반일계몽의식을 키워주었지요.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준 돈 7원으로  《별나라 》,《신소년 》을 비롯한 진보적인 책자들을 사서 모았지요. 당시 무슨 책이 그렇게 많았겠습니까. 이미 일제의 폭정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였고 온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상황에서, 책 하나 출판하더라도 조선총독부의 삼엄한 검열을 거쳐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애써 구해 온 책자들을 가지고 ‘다락서재' 만들었다고 했어요.

집의 본채에서 좀 벗어나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에다 나무가지를 적당히 곁들여 가지고 보금자리 같은 아늑한 공간을 만들었구요. 그 안에 책자들을 걸어놓고 읽었대요. 딱친구들이 많이 모여와서 나무에 바라올라가 그 책들을 보군 했지요. 완전히 독서아지트였지요.

1926년 6월에 ‘카프’아동문학 잡지 《별나라 》가 창간되였어요. 그때 아버지는  《별나라 》 잡지 창간호에다 동시 〈별세상을 세웠네〉를 썼대요. 그것이 아버지가 열네살 되는 해였어요.  《별나라 》 잡지의 반일경향은 상당히 강했다네요. 그 ‘창간호'에는 이런 구절도 있더군요.

주림에 허덕이고 배움에 목마른 동무들아

눌리고 뜯기우는 가난한 동무들아

우리 모두 별나라 기발밑으로 모이자

우리 모두 자랑찬 미래를 건설하자

늘 과묵하고 독서에 열중하던 채택룡선생의 생전 모습.

지금 봐도 상당히 진보적인 표현이였지요. 이 책자의 한달 값이 5전이였대요. 그러니 그 때 할아버지가 주던 7원이면 아주 대단한 것이지요. 아버지는 그때 그 책을 살 수 없어 어머니를 졸라 팥이라든가 록두라든가 닭알도 둬알 받아가지고 읍 시장에 가서 팔아 책 살 돈을 장만해 가지고 《별나라 》 잡지가 창간되여서부터 쭉 구독한 것이였어요.

일제식민지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살아가는 어려운 환경, 째지게 가난한 농민들이 하루 세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우리 할아버지나 할머니, 아버지들이 자식한테 어떤 것을 전수하느냐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대목이지요.

조선족아동문학사의 첫 동시 〈어린 동생〉과 〈개미〉

1928년에 아버지는 자신의 문학인생에서 전환점이 되고 또 중국조선족아동문학사에서도 효시로 되는 첫번째 동시작품 〈어린동생〉을 썼어요. 그것이 아버지가 16세가 되는 해에 쓴 것인데 《신소년 》에 발표되였어요. 이것은 역시 중국조선족아동문학사에서도 제일 첫번째 동시가 되는 것이지요.

〈어린동생〉 내용이 어떤 것인가 하면 지주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는 어머니가 집에 와서도 허리 펼새 없이 지주집에서 가져온 옷견지들을 씻어서 다듬이질 하지요. 어린동생이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 하는걸 보고 순간적으로 달려가서 어머니 손에서 다듬이 방망이를 빼앗아가지고 그 자리로 다듬이돌을 냅다 쳐버리지요. 다듬이돌을 지주면상이라 생각하고 친다는 것이예요. 그런데 방망이가 다듬이돌에 맞아 튕겨나면서 어린동생의 이마를 쳐요. 그러니 동생은 울분을 못 이겨 울어요.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라 지주놈에 대한 증오였겠지요. 어린 동생은 엉엉 소리내여 울면서 다시 어머니한테서 옷견지들을 빼앗아 발로 막 뭉그려버리는 이런 장면을 〈어린동생〉이라는 동시에 담아 처음 발표한 것이지요.

1984년 홍구공원 로신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채택룡 작가.

그것과 동일한 시기 열여섯살 때 또 〈개미〉(1928년)라는 시를 발표하였어요. 역시 오늘날에 와서도 퇴색하지 않는 우리 아동문학의 초창기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고 또 노래로도 널리 불려졌어요.

백양나무 우거진 울타리 밑에

오손도손 잘사는 개미들 마을

오늘도 쉬지 않고 량식 모은다

하나, 둘 떼를 지어 량식 모은다

장다리밭 꿀돼지 놀고 먹는놈

...

여기서 개미는 로동인민을 비유하고 꿀돼지는 지주와 권세자들을 비유하였지요. 후에는 노래로 딱 돼가지고 지금도 인정 받는 노래로 되여 있어요. 〈어린동생〉과 〈개미〉가  《별나라 》잡지에 발표되자 아버지는 너무 기뻐 제일 먼저 책을 들고 할아버지한테 뛰여가 자랑하였지요. 할아버지께서 연신 치하하면서 대견해하던 모습을 아버지는 생전에 몇번이고 언급하셨지요.

총독부의 감시에 걸린 〈아가아가〉

아버님 회고록에도 많이 나오지만 그 당시 조선총독부 도서과의 검열이 상당히 엄격했지요. 그리하여 웬만한 작품이나 책자들은 못 나갔지요. 특히 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폭정이 가시화되였지요. 창씨개명이 시작되였고 노화교육이 기승부릴 때였지요. 이런 상황에서 시나 작품을 쓰는 것도 정말 꾀를 부려야 했지요. 그러니 많이는 개미라든가 참새라든가 제비라든가 이러한 것을 리용한 의인화 수법, 은유적인 수법, 상징적인 수법 이런 것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조선총독부의 그 어떤 감시를 피해나가며 필을 가지고 대응했지요.

 


연길공원 동시원에 세워진 채택룡시비

그러던 1930년 어느 날 아버지는 끝내 왜놈들 눈에 나게 되였어요. 일제노화교육을 반대하여 꾸린 야학교로 아이들을 부른 〈아가아가〉라는 그리 길지 않은 동요를 쓴 것 때문이였어요.

‘아가아가 어서 커라

그리해야 새봄 맞고

글 배우러 야학가지’

‘글 배워야 속지 않고

세상 위한 일군 되지’

그런데 이것이 총독부에 딱 걸린 것이였어요.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그 ‘죄’로 일제의 파출소에 붙잡혀 가 변소청소도 하고 구치소마당 풀도 뽑고 했는데 일주일동안 갇혔다가 풀려 나왔대요. 지금 봐도 상당히 어린 나이에 뚜렷한 반일경향을 가진 작품을 써낸 것이였지요.

그리고 로동인민의 립장에 서서 일제와 지주놈을 질책하고 비난하고,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작품창작을 했다는 것은 우연하지 않다고 생각되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이 반일경향을 가진 작품을 썼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친구아이들을 모아가지고 버젓하게 ‘별나라 신소년 지사’라는 간판을 걸고 서재까지 만들어 아이들을 불러 구독하게 했다는 것은 반일사상전파를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지요.

후날 여러가지로 창작소감을 밝히면서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별나라 》의 영향을 받아 ‘카프'의 기치아래서 목표가 뚜렷하게 창작을 했다는 점을 감회깊게 말씀하시군 하셨지요.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기자 영상 김성걸 안상근 김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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